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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Portrait and Painting 展



Portrait and Painting 展 

"일각수의 꿈은 또 다른 일각수를 만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2018/03/04 ~ 3/20]



“좋은 사진을 만든다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진지한 관심 없이 찍은 사진은 지루한 일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1906~1999


김보하 작가소개 바로가기


사진가가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자신만의 것을 기록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바로,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이라는 것을 자신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입증했던
독일 출신의 모던 컨템포러리 사진가인 파이닝거는 일찍이 코스모폴리탄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초현실적 이미지를 본연만의 의식을 통해 제시했으며,
압도적인 뷰파인더로 새로운 프레임을 완성했던 사진가다.
그의 사진은 영화 배트맨의 배경인 고담을 위한 영감이 되기도 했으며, 데니스 스톡이 남긴 그의 실험적 포트레잇은 사진의 미래를 향한 사진가의 의지와 혁신이 담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현대 사진의 발전이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들어서며 사진을 하나의 기록 사진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미술이라는 장르와는 또 다르게 다양한 사진가들이 완성한 모먼트의

결정체라는 시점에 집중되었다. 바우하우스와 쉬르 레알리즘을 거치며 한스 아르프, 이브 탕기, 모흘리 나기, 프랜시스 피카비아, 막스 에른스트 등은 한 쪽의 영역에 치중하지 않았고
미술과 사진, 타이포그래피 등이 혼합된 믹스드 미디어로서의 표현으로 사진과 일러스트,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도입하여
사진과 미술이 점령해온 고유의 영역에 한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혁명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 시도들은 놀라운 결과물들을 대중에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와 같은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말의 세기말 정서에 점령당하며
쇠락과 한계의 영역을 지닌 일방적 퍼시버로서의 민낯을 드러내는 경향도 발견되고 있는 현재이다.


사진이라는 영역이 이처럼, 현대에 이르러 예술로서의 영역으로 인정받기보다 사진 화면의 대체, 혹은 기록을 위한 형식의 일반적임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고
1930년대의 세계적 문화 황금기에 시도되었던 사진의 스펙트럼은 이미 잊혀져 가고 있다.
아니, 잊혀졌다.


사진 형식의 변화로 인해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바로 현대 사진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사진이라는 매개체로서 리시버가 없는 퍼시버임을 인정하게 된 결과이다.
사진의 순기능이 단지 일상의 기록이라고 인정해 버린 순간,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사진을 업로드하는 인스타그램 셀레브리티들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림이라는 시점을 생동감으로 변화시키고 사진가의 고유시점으로 미학을 거론할 수 있었던 독창적 사진 영역에서 현실만을 말하고 현실의 이익 집단들이 주장하는 것들만 기록하는 것이
사진의 순기능으로 전락해 버린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사진의 역행, 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현대를 자신만의 영혼과 마음으로 담아내야 하는 사진가들의 한계,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의 경우, 청소년 시절- 사진에 깊이 매료되었다.
사진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침식되다시피 했던 나의 어둠의 정서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빛과 같은 곳으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 어느 은사님의 이끌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길을 찾으려 했던 시기에 무척 소심하고 수줍게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의미를 찰나의 미학을 통해 나의 마음을 빗대어 시를 써 내려가듯 당시 나의 순간을 남길 수 있었기에
나의 불온했고 미완성이었던 청소년기의 상처는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했으며 나와 같은 정신의 방황을 걷는 이들과 함께 완성할 수 있는 ‘발란스’에 관해 오래도록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사진가로서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파이닝거의 열린 마음으로, 또 나와 다른 의식을 지닌 아티스트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항상 열망해 왔으며, 이런 작업을 통해
사진이 지닌 커뮤니케이션적 역할의 확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이 협업한 의식의 공유를 결과물로 기대하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정신적 동반’은 바로 지금의 작업과도 같다.
한 쪽이 순간을 포착하고 한 쪽은 그것을 같은 형태로 다르게 채색한다. 그리고 밀도가 높은 서로의 의식을 수없이 확인하고 발견하며 교차한다.
두 사람이 하나의 영역을 공유하면서, 즉 다른 언어로 노래를 부르지만, 완벽한 화음을 완성할 수 있는 아카펠라처럼 하모니의 결정체를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일러스트와 함께 나열되는 나의 사진 작업은 단지 사진이 아닌 그 이상의 가치와 미학으로 정신과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며, 이는 사진이 다시 벨 에포크 시대로 회귀하여 용감한
나 자신의 목소리로 영혼의 노래를 과감하게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영혼의 목소리로 채색한 나의 사진이라고 기록하고 싶다.


새로운 오브제의 투영이 사진 위를 관통할 때 전혀 다른 기존의 사고에서 일상적 미학이 붕괴되는 게슈탈트 붕괴 효과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처럼 다양한 미의식에 대한 표현들이 고유의 양식과 장르로 드러나거나 표출되고, 개개인의 취향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일상다반사적 아티스트’들이 범람하고 있는 SNS의 현실에서
나는, 적어도 조금은 고민한 흔적과 ‘자신만의 회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결과물이 위선을 벗어던진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함께 고민하고 결과물을 완성해 낸 현재의 작품에는 나만의 기억들이 발산하는 따스한 감정과 위로가 있고, 그 시절에 대한 순수함이 현재의 나를 더욱 지탱해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허위적 열정을 가장한 채, 화려한 세계를 동경하거나 찬양하며, 예술은 우아한 그 무엇, 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천박한 집단 럭셔리즘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편파적 의식들이 흉내 낼 수 없을 사진의 ‘순기능’이 바로,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가 없거나 부족한 영역을 보완함으로써 완성해내는 작품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고대 상상의 동물인 유니콘은, 일설에 따르면 실제 존재한 생명체였으나, 일정한 어느 시기에 멸종되었다고도 한다. 왜 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바로 유니콘을 특별하게 했던 일각때문이었다. 생명체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한 쌍으로 존재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데,
우리가 소유한 두 개의 팔과 다리, 귀, 손, 발 등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지만, 유니콘은 하나의 뿔로 자신을 지키려고만 하다가 결국 그 불완전한 뿔을 다른 대상,
그 뿔을 탐한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 점차 목숨을 잃고 소멸되었으며 그 존재는 일각을 지키지 못한 채 멸종했던 것이다.


사진도 바로 이 유니콘을 빗대어 논하자면, 하나의 카메라로 작가의 의지를 단 하나의 표현으로만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도 하겠다.
사진이 상실되거나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구자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영역을 넘나들며 사진으로만 설계할 수 없을 의식의 구조를 설계하고 건축해내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의도하려는 작품과도 같이 두 사람이 나란히 한 쌍의 존재로 한 작업의 구조이며, 이 전시의 테마인 것이다.